우리가 시제품을 제작하여 테스트를 해보고, 유의미한 데이터를 보여주기 전에는 투자자들을 만나는 것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 우리는 NIH (National Institute of Health, 미 국립 보건원)의 SBIR (Small Business Innovation Research) 과제를 통해 Seed money를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SBIR 지원서를 제출한 후 심사를 거쳐 결과를 통보받는데까지 4-5개월 정도 걸리는데, 우리는 운좋게 2011년 여름-가을에 SBIR Phase I 과제 2개를 순차적으로 받게되어 CEO인 Jose와 CTO인 내가 풀타임으로 NanoCellect에서 일할 수 있을 정도의 seed money를 NIH로부터 받게되었다.
드디어 진짜 스타트업으로서 첫걸음을 뗀 것이었다!
SBIR은 무엇인가?
미 정부의 SBIR (Small Business Innovation Research) 프로그램 이라는 글에서 이미 SBIR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번 스얼에서 발표한 자료를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쭉 정리해보고자 한다.
Small Business Innovation Research 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SBIR 프로그램은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연구개발을 하는 스타트업 혹은 중소기업에 연구개발 지원금을 주는 제도 이다. 미국의 연방 정부 기관 (agency)들이 내부적으로 수행하는 R&D 외에, 대학이나 연구소 혹은 회사들에 나누어주는 연구 개발비가 있는데 이를 External/Extramural R&D 예산이라 한다. 한국에서 연구 재단이 각 대학이나 정출연등에 주는 연구 예산과 같은 것이라 보면 된다. 이 External R&D 예산의 규모가 연간 $100 million (1천 1백억원) 이상인 미국 연방 정부 기관들은 그 예산 중 1.25% 를 (지금은 3.2%) 무조건 (MUST) SBIR에 사용해야만 한다는 법이 1982년에 제정되었다.
SBIR 프로그램의 mission 은 혁신적인 과학 기술을 갖춘, 직원 수 500명 미만의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에 미국 연방정부가 ‘투자’를 하여 성장시킴으로써 미국 경제를 더욱 탄탄하게 발전시키는데 일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혁신적인 기술력을 지닌 스타트업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연방 정부가 seed money를 지원해준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SBIR은 흔히 America’s Seed Fund 라 불리운다.
SBIR은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 법제화가 된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 중인 2018년 현재까지 여러번 미국 의회의 재승인을 거쳐단 한 번의 중단도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내용을 바꾸거나 폐지하고자 한다면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바뀐다고 하여, 집권 여당의 정치적 성향이 바뀐다고 하여 마음대로 어찌할 수가 없도록 처음에 제도를 잘 설계했다.
내 이전 글 SBIR 프로그램 40주년을 가능케 한 mission statement 에서도 언급했지만, SBIR 정책은 mission 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고, 이에 맞게 정책을 운영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잘 마련이 되어있었기에 40여년간 지속되어 오면서 실질적인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한국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기술기반, 실험실 창업 지원 정책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런 정책들을 보면, 왜 그 정책들이 시작되었으며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등에 대한 mission statement를 찾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장기적인 비전도 보이지가 않고 담당자가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면 소리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힘들다. 더 큰 문제는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다보니 ‘일자리 창출’과 같은 부수적인 지표들이 정책 평가의 기준이 되어, 오히려 과제 지원을 받는 스타트업들에게 도움을 주기보단 짐을 지우는 역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 한국 정부에 시행하고자 하는 ‘창업 관련 정책들’은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비전이 있는가? 그리고 20년, 30년 후에도 그 정책들은 예비 창업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해 봤으면 한다.
- 이에 대해서는 얼마전 BRIC에 기고문을 하나 쓰기도 했다. (조급함이 초래하는 실험실 창업 지원 정책의 비효율성)
40 여년간 꾸준히 증가해 온 SBIR 예산
위의 표에서 보듯이 처음 이 프로그램이 처음 시행되었을 당시 예산의 0.25%만 SBIR에 의무적으로 할당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왜냐면, 미국에서도 역시 ‘정부가 왜 사기업에 세금을 들여서 지원을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논란이 심했던데다, 저 External R&D 자금은 원래 대학이나 연구소로 배정되어야 할 몫으로, 대학 교수나 연구소 종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와야할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금의 일부가 ‘삭감’되는 것이라 반발이 아주 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런 이유로 1982년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기 전에 미국 과학재단 (NSF) 내에서 작은 규모로 SBIR 프로그램을 Pilot 형태로 5년여간 시범 운영 하면서 실제 이 프로그램이 기술 상용화에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이해당사자들을 대상으로 설득해가고, SBIR에 할당해야 하는 예산의 규모도 0.25% ~ 1.25% 범위에서 합의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실험실에서 나온 혁신적인 연구 성과물들이 실제 상용화되는 과정인 스타트업을 시작하는데 있어 SBIR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에 서서히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서 1988년에는 SBIR에 배정되는 예산 비율이 1.25%로 6년 사이에 5배 가량 증가하였다. 이 비율은 그 후로도 꾸준히 증가하여, 지금은 3.2%를 무조건 SBIR에 배정해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보면 약 $2.5B (2조 7천억원)이 SBIR에 배정되었다. 그 중 국방부 (DoD)가 SBIR에 약 1조 1천억원을 집행했고, 우리 회사에 SBIR 과제를 주었던 국립 보건원 (NIH)에서도 8천 8백억원의 SBIR 예산을 집행하여 수천개의 스타트업 및 중소기업들의 혁신적인 연구개발을 지원했다. 그 뒤를 이어 에너지 자원부 (DoE), 과학재단 (NSF), 미 항공 우주국 (NASA) 등이 각각 2천억원 가량을 SBIR 프로그램에 사용하였다.
이렇게, SBIR에 의무적으로 배정되는 예산 규모가 꾸준히 증가한다는 것은 SBIR 프로그램이 꾸준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매년 이 정도의 예산이 꾸준히 기술기반 스타트업, 테크 스타트업에 투입되니 우리 처럼 가방끈 긴 아마추어들도 SBIR로 seed 투자금을 받아 연구 성과를 상용화 하기 위해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3단계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지원
그럼 SBIR 과제에 선정되면 얼마를 지원받을까?
Agency 별로 다르지만, NIH의 기준으로 살펴 보자. 일단 크게 Phase I, Phase II, Phase II Bridge, Phase 3 이렇게 4단계로 나누어 지원하는데, Phase I을 통과한 회사들이 Phase II에 지원할 수 있고, Phase II를 무사히 마친 회사들만 Phase II Bridge, Phase 3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경쟁률이 약 8:1 정도인 Phase I 과제에 선정되면, 6-9개월간 연구개발비로 최대 $225,000 (약 2억 5천만원)을 받게된다. 이 단계에서는 시제품을 개발하고, 상품화 가능성을 증명 (feasibility test)하는 것이 목표인데, 구체적으로 해야할 일들은 아래와 같다.
- Explore product-market fit
- Determine your technology’s feasibility
- Design and test prototypes
- Identify any relevant legal or regulatory issues
- Develop a plan to scale and market your technology (출처: NSF SBIR)
덕분에 우리는 SBIR Phase I 과제를 진행하면서 모든 투자자들이 우리들에게 공통적으로 했었던 아래 세가지 질문 중 1, 3번에 대한 답을 어느정도 찾을 수 있었다.
- 당신들의 기술이 상용화가 가능한가? 시장은 존재하는가?
- 창업팀이 비즈니스 경험이 있는가?
- 시제품을 만들어서 Product-Market fit 여부를 테스트 해볼 수 있는가?
6-9개월이라는 SBIR Phase I 의 기간이 짧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SBIR은 기술 기반 스타트업의 제품 개발을 지원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저 기간내에 빠르게 시제품을 개발하고 비즈니스가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에 대해 proof of concept를 보여주어야 한다. 무한정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서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니며, 스타트업의 강점이 빠른 실행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적당한 시간이라고 생각된다.
Phase I 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다음 단계인 Phase II 에 지원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시제품을 넘어 실제 판매가 가능한 제품을 개발하고, 어떻게 제품을 판매할 것인지에 대한 business/commercialization plan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야한다. 경쟁률이 약 3:1 정도인 Phase II에 선정되면 2년간 약 $1.5 million (16억 5천만원) 을 지원받는데, Phase I, Phase II를 연이어 받게되면 거의 20억원의 ‘정부 지원금/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다. 이 정도 규모이면 IT 분야에 비해 초기 자본금이 많이 필요하다는 하드웨어 스타트업이나 바이오 스타트업들에게도 적지 않은 seed money이니, 관련 스타트업을 하려고 하는 이들은 한 번 도전해 볼만 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Phase II까지 마친 회사들이 임상 시험이나 FDA 승인 절차등을 위해 추가 자금이 필요하면 Phase II Bridge 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총 $3 million (33억원)까지 지원을 해준다. 단 외부에서 유치한 VC 혹은 Angel 투자금에 대한 1:1 매칭의 형태이므로, VC 투자를 받고 제품개발이 마무리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clinical test를 진행할 때 추가 자금이 필요한 회사들만 지원이 가능하다.
경쟁률은 높은 편이지만, SBIR Phase I, II에 선정 되면 스타트업들은 2-3년간 크게 돈 걱정 하지 않고 제품 개발과 고객 발굴, 그리고 투자 유치등에 집중하면서 비즈니스를 성장시킬 수 있다. 가방끈만 긴 아마추어, 비즈니스 애송이였던 우리 셋도 이 과정을 거치면서 많이 배우고 단련되어, 투자자들의 두번째 질문인 “창업팀이 비즈니스 경험이 있는가?” 에 자신있게 YES 라고 답할 수 있게 되었다.
No Strings Attached – 조건없이 주는 창업 지원금 SBIR
일단 선정만 되면 3년간 약 20억원을 지원해주고, 그 과정에서 가방끈 긴 초짜 석박사 창업자들에게 자연스레 비즈니스 트레이닝까지 시켜주는 것으로 모자라, SBIR은 지원을 받는 스타트업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No Strings Attached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아래 슬라이드에서 보듯이 SBIR 지원금을 주는 대가로 스타트업의 지분을 요구하지 않고, 대출도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회사가 성공을 했건 아니면 실패를 했건) 갚아야 할 필요도 없다. ‘연대 보증’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여기에 더해서 미국 정부는, SBIR을 받아 성공한 회사들에게 기술료 혹은 성공료 등을 부과하지 않는다. 또한, (예외적인 경우가 드물게 있으나) SBIR 과제를 진행하며 추가로 발명하게 된 지적 재산권은 모두 스타트업에 귀속된다. 우리 회사 역시 SBIR 프로그램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특허를 여러개 출원했었는데 이 그 특허들은 모두 NanoCellect 소유의 자산이다. 우리가 미국 정부에 특허사용료 등을 내지 않는다.
자, 당신이 미국에서 테크 기반 스타트업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정말 매력적인 프로그램 아닌가?
실험실 창업 기업의 기술적, 인적 리스크를 낮춰주는 SBIR 프로그램
덕분에 우리 회사는 지분 희석 (Equity dilution) 없이 WOLF Cell Sorter 와 N1 Single Cell Dispenser 두 개의 제품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사 설립 초기인 2010-2011 년에 만났었던 투자들이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었고, Jose, Willam, 나도 가방끈만 긴 애송이 창업자들에서, NanoCellect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 나가는 프로페셔널로 조금씩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SBIR은 단순히 스타트업에 단순히 seed money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우리들처럼 비즈니스 경험이 일천한 실험실 창업 기업의 석박사 학위 창업자들이 R&D를 넘어 비즈니스를 하는 방법을 교육해주는 역할도 부수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2010년 프리젠테이션 자료와 2014년 자료를 비교해보았을 때 그 차이를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2010년 자료에서 보이는 그 어설픔과 근거없는 패기를 보니 그저 웃음만 나왔었다. 물론 이는 그만큼 우리가 성장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SBIR 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런 훌륭한 ‘실전’ 비즈니스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Phase I 에서 8:1, Phase II 에서 3:1 의 경쟁률을 뚫고 대학교수나 연구원, 기업들의 CTO, CSO로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에 의해 선정이 되었다는 점은 최소한 우리가 갖고있는 기술이 허황된 것은 아니며, 비교우위를 갖고 있어 이 분야에 혁신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어느 정도 증명해주는 것이이다. 따라서, 투자자들이 보기에는 초기 단계의 기술적인 리스크가 다소 해소된 것이므로, 우리가 2015년 초에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하기로 결정하고 VC 들을 만나 피칭을 할 때 큰 도움이 되기도 했었다.
지속적으로 혁신 기술 기반 창업을 장려하는 SBIR 프로그램
요약하자면, SBIR 프로그램은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연구개발을 하는 스타트업에 Seed money를 제공하는 미국 연방 정부의 정책인데, 이를 통해 탄생한 많은 회사들이 성장하면서 미국 경제의 성장 동력이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스타트업의 지분을 요구하거나 창업자들에게 상환의 의무를 전혀 지우지 않기 때문에 정책 입안 과정과 시행 초기에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40년 동안 이 프로그램이 혁신적인 기술들이 연구실을 벗어나 실제 상용화되었고, 많은 회사들이 중견 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하면서 미국 경제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므로 SBIR 프로그램의 규모가 오히려 성장하고 있다.
덧붙여, 99%의 실패 위험성을 무릅쓰고 1%의 성공 가능성에 정부 세금을 투입하는 것이 자칫 도박처럼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1%의 성공에 베팅하는 것이 아니라, 99%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다음 도전과 그 성공에 투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 쪼박의 SBIR에 대한 글 모음
-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런치 클럽 강연 영상: https://youtu.be/dYoPs0GmF7E
- 스타트업 얼라이언스 런치 클럽 발표 자료: https://goo.gl/WCEh4m
- 샌디에고 쪼박
기술창업(Tech-Driven)과 기회창업(Market-Driven) 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창업의 동기, 창업기회의 속성, 창업 및 기업 발전 과정 등의 측면에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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